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초끈이론은 단순한 과학의 경계를 넘어 인간 존재와 현실의 본질을 묻는 질문으로까지 확장된다. 오늘은 초끈이론이 과학에서 철학이 되는 순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론이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철학자들까지도 사로잡는 이유는, 그 안에 우주와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질문을 던지다.
초끈이론은 입자 물리학과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이론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논의는 점점 과학의 실증 범주를 넘어선다. 이론적으로 존재하지만 실험으로는 증명되기 어려운 고차원의 세계, 수학적으로는 완결되지만 물리적으로는 검증 불가능한 개념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10차원이나 11차원과 같은 개념은 인간의 직관과 경험을 벗어난다. 이 차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단순히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정인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초끈이론은 과학적 방법론이 허용하는 경계 밖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사고를 확장한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초끈이론은 실험 이전에 이론적 조합으로 완성되며, 이는 고대 철학자들이 우주의 본질을 논하던 방식과도 닮아 있다. 결국 이 이론은 '우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지며, 과학을 넘어선 인간 사유의 지평에 도달하게 된다.
수학이라는 언어로 철학을 노래하다.
초끈이론이 과학을 넘어서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는 수학이라는 언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이론은 아주 작은 끈의 진동 패턴이 다양한 입자를 구성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 진동의 방식은 물리적인 관측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수학적 정합성에서 도출된다. 즉, 실재의 증거가 아닌 이론 내부의 수학적 아름다움이 곧 이론의 존속 근거가 된다. 마치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 세계처럼, 수학은 이 현실 너머의 질서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물리학자들은 종종 수학적으로 아름답고 자기모순이 없는 이론에 진리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순간 철학적 판단으로 넘어간다. 실체가 아닌 수식이 진리를 말하는 구조는, 과학의 실증성에서 벗어나 철학의 형이상학적 기반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초끈이론은 단순히 과학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텍스트로도 읽힌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진동하는 하나의 끈이라는 생각 앞에서, 과학적 사고와 철학적 사유가 나뉘는 지점을 재조명하게 된다.
이론이 세계관이 되는 순간
초끈이론은 이제 단순한 물리학 이론의 지위를 넘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뉴턴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관찰 가능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었지만, 초끈이론은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수준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틀을 다시 정의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들은 실체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끈이 특정 방식으로 진동할 때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이는 현실이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동, 즉 정보와 관계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결국 초끈이론은 '존재란 무엇인가',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과학이 던지는 하나의 응답이다. 과학이 세계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데 그쳤던 과거와 달리, 초끈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그 경계를 탐색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떠나 사유의 세계로 향하게 만들고, 일반 대중에게도 물리학을 통한 철학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과학과 철학을 분리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초끈이론은 그 둘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다리로 작용하고 있다.